2025. 06. 17
나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회고를 하고 싶다. 생각할 시간을 무한히 집어넣는 것만 같은 2025년의 가운데에서 주변 정리가 필요함을 강하게 느낀다. 늘 비슷한 고민에 가로막혀 진짜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번 회고의 핵심 키워드는 '솔직함'이다. 마음속 깊숙이 내려앉은 생각의 골을 끌어올려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후, 무심하게 잘라 다시 들여다볼 것이다.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고민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회고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 자신을 해체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자.
1.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때 늘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는 문장이 있다.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 그렇다, 나는 만드는 걸 정말 좋아한다. 종이게임, 개인 방송, 영상 편집, 방송 촬영, 게임 기획, UI 디자인, UX 리서치, iOS 개발, 스타트업, 개인 프로젝트 등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때 가장 앞단에 나오는 단어들을 일반화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만듦'일 것이다. 그냥 만듦이 아니다. 혼자 만들고 즐기는 레고나 프라모델도 좋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원하는 만듦의 목적은 사람들과의 소통에 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사람들의 피드백과 즐거움을 어떤 식으로든 경험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지 않았나 싶다. 바꿔 말해 사람들과 이상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삶의 많은 부분을 긍정적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예상한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의심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맥락은 자연스레 취업에 대한 생각을 재정의하게 했다. 나는 왜 취업을 하려 했을까? 대외적인 것이며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경제적 자립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불변의 법칙일 것들 말이다. 내게 위 두 가지 목표는 중요하다. 버킷리스트에 등장하는 낯선 나라들로의 여행,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고픈 경험,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모두 어느 정도의 목표 달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리스크가 적은 일이 취업이다. 최악의 상황을 제외하면 최소한의 자립과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취업은 어느 하나 쟁취하지 못한 현 상황에서 최선일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업을 자아실현의 개념과 연관 짓는 순간 다시 한번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맞을까?라는 질문이다. 아직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회사 생활을 통해 넓은 시야와 사람을 경험하고 큰 문제를 조직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아실현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체적인 결정과 실행에 있어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정답이 없는 고민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정신없는 취업 준비 중 간간이 찾아오는 결과들이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12월의 마지막 날 이후로 자신감은 떨어져만 갔고 점점 시들어만 갔다. 취업과 자아실현을 묶는 행위 자체가 도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조건으로 진즉 취업을 성공했으면 과연 이런 고민을 했을까 와 같은 비겁한 생각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할 순 없었다. 지금까지 이어온 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시기를,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 명확한 동기가 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고, 행복하게 살 책임이 있다. 이해가 안 되고, 포기하고 싶고, 허무하고, 좌절하고, 끝이 없을 것 같고, 어두워도 내가 걸어야 할 소중한 길이다. 그래서 나는 더 유연해지려 한다. 도망이 아님을 명확히 말하고 싶다.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에 필요한 방법이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고 추진해 보려는 것이다. 취업이 어렵다면 더 어려워 보이던 개인 프로젝트든 사업이든 도전해보려 한다. '원래 알던 것의 봉우리'에서 내려와 가보지 않았던 길을 내디뎌보려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뜻밖의 배움을 얻듯, 하나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인생에서 찾아온 행운이 그랬듯.
결국 나는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넘어, '주체적으로 인생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2. 그 첫 번째 도전, 포포라치
결심을 행동으로 바꾸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부터 해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곧바로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큰 자산이었다.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기술 검증을 위한 프로토타입 개발을 완료했고 둘째 날 본격적인 기획과 UI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렇게 약 1주일 후 MVP 모델의 1.0.0 버전을 배포하게 되었다. 1년 전 진행한 개인 프로젝트 '데이블럭'의 주요 회고 포인트가 빠른 출시 및 검증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포포라치는 빠른 검증에 성공하지 못했다. 개인의 경험과 데스크 리서치로만 빚어진 기획은 실제 사용자의 목소리를 완벽히 대변할 수 없기에 더욱 세심한 후속 리서치가 필요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진행하지 못했다. 우선 코어 타겟으로 가정한 '아이폰 앨범 기능을 자주 활용하는 사람'을 찾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정작 나부터가 앨범 정리가 어려워 앨범 기능을 활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는데 말이다. 또한 공간적, 환경적 제약으로 불특정 다수를 활용한 리서치도 제한적이었다. 집에만 있어서는 해결할 수 없음을 느낀 지점이기도 하다. 명함이라도 파서 여행자들이 몰리는 곳을 찾아가야 할까 생각도 했지만 실행력의 부재로 무산되었다.(이는 나중에 꼭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과의 소심한 타협을 통해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SNS의 활용이었다. 약 2달간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피드백들을 모아 크고 작은 14번의 업데이트를 진행했다. 또한 사용자들을 적은 비용으로 어떻게든 끌어모으기 위해 인스타그램과 스레드 계정을 생성해 게시물을 올려 마케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마케팅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다. 디자인이나 개발보다 마케팅이 더 어렵다는 주변인들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시작이 의미 있는 반이 될 수 있도록 나머지를 꾸준히 쌓아 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 그다음 스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추가하고 싶은 기능은 많으나, 실제 사용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현을 위한 추가 리소스를 투입하는 것이 경계되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최소한으로 업데이트해야 할 자잘한 버그 및 핵심 기능 추가 후 리서치를 진행해 방향성을 결정하려 한다. 그 끝이 다음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후회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볼 것이다.
3.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길
거시 세계는 모두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손이 닿는 모든 곳에 적용되어 가는 중인 AI는 기대감만큼이나 큰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 고유의 것이라 자신하던 상상력, 그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을 때 수많은 생각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만들어내고자 기술을 갈고닦던 시간들의 가치가 옅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올랐던 지식의 봉우리가 허무한 길이 아니었으면 했다.
처음엔 AI 활용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직접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이야 말로 배움의 정수라 믿었다. 디자인과 개발 모두 직접 해야 의미 있다 믿었다. 아니, 나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교차 검증만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래야 '나'라는 사람의 기술적 존재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산자의 관점을 가지기로 결심한 순간 기대감은 두려움을 넘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잘하던 것은 더 꼼꼼히, 새로운 것은 더 쉽고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도구를 어느 생산자가 마다할 수 있을까. UX/UI 디자인과 iOS 개발에 국한되어 있던 세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올랐던 지식의 봉우리는 결코 허무하지 않다. 백지상태, 즉 가치 판단의 기준 없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올랐어야 할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영상 편집에서 디자인으로 전환했을 때, 디자이너에서 개발자로 전환했을 때 당시는 '더 빨리 시작했었더라면...'과 같은 가정을 하며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 점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콘텐츠 제작의 감, 디자인과 개발 모두 가능했기에 시도해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것은 절대 의미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여정도 그렇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이 빠르고 복잡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몸을 맡겨야 한다. 지식은 지키는 것이 아닌, 흐르게 두는 것이라 했다. 다음 프로젝트부터 AI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한다. 기획부터 마케팅, 웹 및 백엔드 개발 등 필요하면 뭐든 시도해 볼 것이다. 늘 그랬듯 쉽지 않겠지만 결국 또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4. 정리
생각이 많아 잠이 오지 않는다. 수많은 호기심과 불안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만족할만한 결론이 나지 않으면 제대로 자긴 힘들 것이다. 사실 결론을 내더라도 멀지 않아 비슷한 고민, 비슷한 결론으로 반복되곤 한다. 머리 한편에 잘 올려두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디 두었는지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한 번 올려둔 생각을 쉽게 꺼내보기 위해선 정리가 필요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찾고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정리가 필요하다. 그게 기록이다. 기존에 느끼던 보관, 공유, 효용감의 목적을 넘어 정리를 위한 기록을 하자. 공 들여 생각한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는 생각을 더 단단하고 다양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5. 옆자리에 관하여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이란 무엇일까. 바라지 않는 상황이 다가와도 그 선택을 한 과거의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전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해 봤다. 어떤 감정인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그 안엔 100가지의 불확실한 것과 1가지의 확실한 것이 있었다.
나는 대부분 100가지의 불확실한 것에 시간을 맡겼다. 그게 편했으니까. 적어도 지금 같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늘 1가지의 확실한 것, 진심을 전하지 못한 것에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음을 의미했다. 다시 한번 그러지 않았으면 하지만, 정말 그렇지만 여전히 어렵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소 같았을까, 평소 같지 않았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다른 곳을 보고 있을까. 어느 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후회하지 않을 용기를 품고 한 발짝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설령 두 발짝 멀어질지언정, 그것이 나와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간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